주민과 의병 일으킨 강화진위대… 망국의 길목에서 최후까지 맞서

-경인일보, 박경호 기자, 2019-04-04.

강화도 의병들은 망국의 길목에서 최후까지 일본에 맞서 싸웠다.

190781일 황실을 지키는 서울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해체됐다. 서울시위대 군인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남대문에서 봉기했지만, 일본군에 3시간 만에 제압당했다. 전국의 지방군대 중에서는 강화진위대와 원주진위대만이 해산 명령에 불복종했다.

50여명에 불과했던 강화진위대 군인들은 그해 89일 강화도 주민 500여명과 합세해 의병을 일으켰다. 다음날 군대 해산을 위해 강화에 진입한 일본군을 상대로 이틀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군인 출신 연기우(생몰 미상), 지홍윤(?~1909), 이능권(1864~1909) 등이 강화 의병투쟁의 선봉장이었다.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강화 의병의 주력부대는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 일대로 퇴각해 전국적인 의병 연합전선에 합류했고, 일부는 강화에 남아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강화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다. 그래선지 강화도 민중들은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이 유독 강했다.

하곡 정제두(1649~1736)로부터 대대로 이어진 강화학파 사상과 이동휘(1873~1935)의 교육운동은 강화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강화 의병이 일어난 게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의병투쟁은 19193월 강화지역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됐다. 이후에도 강화 만세운동 현장에 있었던 죽산 조봉암(1899~1959)을 필두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강화에서 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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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해산에 '일어선 군인들'짧지만 격렬한 저항의 꽃 피우다

한반도에서 발발했던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전란이 강화도를 비켜간 적은 거의 없었다. 고려 때는 여몽전쟁, 조선 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강화를 휩쓸었다. 강화도가 예로부터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일 수 있던 데는 이들 전란이 배경이 됐다. 그때마다 외세에 맞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일본이 국권 침탈을 본격화하던 1900년대 말 강화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저항은 유난히 거셌다. 강화에서 봉기한 의병장들은 전국으로 뻗어 나가 활약했다. 이들은 한일 강제합병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의병운동이 사라질 때까지 남아 싸웠다.

190812월 체포된 강화 의병장 이능권. '헤이그 밀사'의 호위 무사를 맡기도 했던 군인 출신으로, 강화에서 '대동창의진'이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해 친일파 처단 등에 앞장섰다. /독립기념관 제공

19078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며칠 뒤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했다. 강화도 의병은 같은 해 89일 군대 해산에 반발한 강화진위분견대 군인들이 일으켰다. 진위대 장교였던 연기우(생몰 미상), 지홍윤(?~1909), 유명규(?~1907) 등이 중심이 됐다. 군인 출신인 이능권(1864~1909)도 후기 강화 의병을 이끌었다.

지방대대였던 강화진위대는 1896300여명 규모로 설치됐다. 1900700여명 규모로 확대됐다가 1905년 수원에 본부를 둔 보병대대 산하 분견대로 축소됐다. 군대 해산 때는 50여명 규모로 병력이 쪼그라들었다. 해산 당일 소대장(분견대장)인 민완식이 병사들을 집합시켜 서울시위대 해체 소식을 알렸다. 급료와 여비를 나눠주면서 무기와 군복을 반납하고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 군인 50여명은 소대장에게 무기를 내어달라고 요구했고, 군중 500여명이 호응했다고 전해진다.

 

강화문화원이 1983년 펴낸 '증보 강화사'에는 의병 봉기 현장에 있었던 고제원씨의 증언이 실렸다. 고씨는 "너나없이 무기고 창을 깨트리고 들어가 총 한 자루에 탄환 두서너 줄씩 들고 나와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늘어뜨리고 나왔다""수백명 군중이 총을 들고 나서고 보니 군대 해산의 여파이기는 하나 대항하러 나서는 군대의 대열이 아니오 울분한 백성들의 폭발 직전의 동요였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1907810일 일본군 제14연대(빨간색 선)는 갑곶으로 상륙해 강화읍성 동쪽 성벽에 매복해 있던 강화 의병부대(파란색 선)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 의병은 강화읍으로 철수했다. 갑곶 동북쪽 고지에 진을 친 일본군은 11일 새벽 강화읍 공격에 돌입해 강화진위대 병영을 장악했다. 방어하던 강화 의병부대는 일본군 화력에 밀려 퇴각했다.

총기로 무장한 군인과 군중들은 파출소를 습격한 뒤 관아로 가서 강화군수 정경수를 찾았다.

정경수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이기도 했는데, 의병이 일어난 직후 개성으로 달아났다. 일진회 강화지부장 양학진은 의병들에게 붙잡혀 끌려다니다 강화읍 동문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

강화 의병의 본격적인 전투는 다음날인 10일부터 시작됐다. 이날 일본군 제14연대 오구라(小倉) 대위는 강화진위대 해산 임무를 맡아 보병 1개 소대와 기관총 2문을 이끌고 서울에서 강화도로 급파됐다.

1913년 일본의 조선주차군사령부가 발간한 '조선폭도토벌지'에는 오구라 부대가 의병 봉기를 모른 채 강화도에 진입했다고 나온다. 일본군은 갑곶으로 상륙해 강화읍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벽에 매복해 있던 의병 50여명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이날 전투에서 일본군 6명이 사살됐고 5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황현(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 전투에서 일본군 56명이 사살됐다고 밝혔다. 황현은 이건창(1852~1898), 이건승(18581924) 등 강화에 사는 강화학파 양명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강화 의병 전투 상황을 상세히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의병부대는 강화읍으로 철수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일본군은 갑곶 동북쪽 고지에 진을 쳤다. 의병 10여명이 통진군(현 김포시) 분파소에서 총기 10정과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때 의병에 가담한 진위대 군인과 주민은 800여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이튿날 새벽부터 다시 강화읍을 공격했다.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성내로 진입한 일본군은 이날 오전 7시께 진위대 병영을 점령했고, 의병부대는 후퇴했다.

강화전투 이후 연기우는 적성(파주삭령(연천철원으로, 지홍윤은 황해도 해서지역으로 각각 주력부대를 이끌고 내륙으로 들어가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처럼 군대 해산에 저항하는 군인들이 주도한 의병부대는 전국에서 강화와 원주뿐이었다. 한일 강제병합 직전까지 이어진 무장투쟁인 '정미의병'(19071910)의 시발점이다.

의병의 모습은 어땠을까.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 극동 특파원으로 1906~1907년 조선에 머물렀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Frederick McKenzie·1869~1931)1920년 펴낸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에는 충북 제천지역 의병 종군기가 나온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다.

'그들은 모두가 18세에서 26세 사이의 청년들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이었는데 그때까지도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중략) 여섯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서 다섯 가지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의 어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서양식 무관복을 입은 대한제국 강화진위대 장교들. 앞줄 가운데 있는 인물이 강화진위대장을 지낼 당시의 이동휘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다. /독립기념관 제공

강화 의병 봉기 진압작전을 지휘한 오구라 대위는 이후 대한제국 무관학교 수석교관으로 부임했다. 190712월에 입학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 가운데는 강화 출신 김영섭(1888~1950)도 있었다.

이원규 작가가 사료를 바탕으로 2016년 쓴 역사소설 '마지막 무관생도들'에는 김영섭이 교관인 오구라 대위에 대해 "내 고향 강화의 원수, 나라의 원수야. 그런데 이동휘 참령님의 추천을 받은 내가 그놈의 훈육을 받게 되다니!"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독교 목사가 된 김영섭은 일제강점기 후반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감리회연맹 이사를 맡는 등 친일의 길을 걸었고, 해방 이후 하와이 총영사를 지내기도 했다.

주력부대가 떠났으나, 강화지역 의병투쟁이 사그라지진 않았다. 산악지대로 숨어든 의병부대는 강화읍 국화리, 양사면 철산리, 화도면 덕포리, 교동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시기 강화 의병을 이끈 의병장은 이능권이다. 중앙군인 서울시위대 장교 출신인 이능권은 군대 해산 후 고향인 강화로 내려와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陳)이라는 이름의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이능권은 1905년 고종의 밀서를 갖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향한 이준(1859~1907) 열사 일행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을 만큼 뛰어난 군인이었다. 강화지역 장사들을 모았다는 이능권의 대동창의진은 일진회 회원들을 처단하거나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일본군이 병력 200여명을 강화도에 급파해 이능권 부대와 전등사 등지에서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당시 이능권 부대의 병력은 20여명이었고, 무기는 화승총이 전부였다고 한다.

'독립운동사자료집'에 실린 일본군 기록을 보면, 190810월 하순께 강화에 파견된 의병토벌대가 이능권 부대와 전등사 등지에서 지속해서 싸우고 수색했으나 '별무소득이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게릴라전으로 명성을 날리던 이능권은 190812월 주민의 밀고로 체포됐고, 이듬해 9월 경성재판소에서 강도죄와 모살죄로 교수형이 확정돼 두 달 뒤 순국했다.

1907811일 강화읍 전투 이후 강화 의병 주력부대는 섬을 빠져나가 내륙에서 장기전에 돌입했다. 연기우 부대는 현 경기도 북부지역, 지홍윤 부대는 황해도 해서지방으로 진출했다. 강화에 남은 의병부대도 산악지대 등지로 흩어져 활동을 이어갔다.

강화 의병 봉기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1873~1935)의 영향을 받았다는 시각이 있다. 이동휘는 강화진위대 규모가 가장 컸던 1902~1905년 강화진위대장을 지냈다. 진위대장을 사임한 뒤 강화 전역에 보창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 힘썼다. 전문가들은 보창학교 출신 강화도 주민들 상당수가 의병 봉기에 합류했다고 보고 있다.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192058일자 독립신문에 기고한 '의병전'에서 군대 해산 직전인 190782일 지홍윤 등 군인, 기독교인들과 '거의(擧義)'를 계획했다고 기록했다. 일본 경찰은 강화 의병 봉기 4일 뒤인 813일 이동휘를 체포해 4개월 가까이 경시청에 감금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은 의병이 일어나는 데 이동휘의 영향력이 컸다고 봤지만, 혐의를 찾지는 못했다.

강화를 벗어난 연기우 의병부대는 1907년 가을 '13도 연합 의진'에 참여해 서울 진공을 감행했다. 1908년 전국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했는데, 그가 언제 세상을 떴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해서지방에서 활동한 지홍윤은 1909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중에서 순국했다.

강화에 남았던 유명규는 190796일 통진에서 체포돼 순국했다. 강화진위대 출신 오윤영(?~1971)은 강화도 서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이어가다가 강화를 탈출한 이후 만주 독립군에 입대하는 등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김덕순(1878~1909)도 동료 의병 수십명과 함께 19086월부터 교동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09년 교수형을 받고 세상을 떴다.

짧지만 격렬했던 강화 의병 투쟁의 정신은 19193월 강화지역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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