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흥왕사지

-법보신문(1456), 2018.09.19.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자 지정학적으로는 정치, 군사, 교통의 요충지여서 고대로부터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였다. 또한 잘 알려져 있듯이 고려~조선시대에는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고 수도방어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지리적 환경 때문에 강화도에는 많은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조사된 것만 500여 곳이 넘는다.

강화도에는 면적에 비해 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다. 강화도의 불교유적은 삼국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활발하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왕실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옮겨온 이후부터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강화에 사찰이 많이 건립된 것은 강도천도기에 왕실과 지배계층의 정신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이후 번창했던 다양한 유적들이 지금은 폐허가 되어 희미한 건물자리와 몇 장의 기와만 남긴 곳이 대부분이며 그나마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강화지역 불교유적에 대해서는 2002년 조계종 문화유산 발굴조사단이 강화도 문화유적 분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그 현황을 정리하였으며, 2010년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의 사지보고서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강화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백제시대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이 236년 서해대도에서 사냥을 하여 사슴 40마리를 쏘아 잡았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서 서해대도는 강화도라 여겨지고 있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백제가 3세기 이전에 이미 강화지역을 확실한 영역으로 편입한 사실이며, 이를 바탕으로 마한을 병합하면서 해양활동 거점을 확보해 나갔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관련된 전설도 전해지고 있는데, 장수왕의 명에 따라 천축대사가 고려산에 올라 연꽃을 날려 떨어진 곳에 청련사·홍련사·백련사·황련사·흑련사 등 5개의 사찰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도 강화에는 청련사, 백련사, 황련사가 법등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선덕왕은 782년 발해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고려가 건국되고 무인이 집권한 시기 강화는 몽골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면서 전시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다. 고종 18(1231) 몽골로부터 1차 침략을 당한 고려는 이듬해 강화로 천도한다. 천도와 함께 궁궐공사가 시작되었고, 주거시설과 방어시설도 축조되었을 것이다. 천도 당시 개경의 인구가 10만호, 50만명 정도였으므로 이 중 1/3 정도가 강화로 이주하였다면 최소한 15만명 이상이 강화에 거주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되자 식량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된다. 현재 강화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경작지는 이때부터 조성한 간척지이다. 그러나 이주민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식량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낯선 곳에서의 외롭고 고달픈 삶을 위로해 줄 그 무언가가 절실했을 것이고 정신적 위안이 되어 준 것이 불교였다. 이런 연유로 강화에는 개경일대의 사찰들을 모방하여 많은 사찰이 조영되는데, 팔관회, 연등회와 같은 종교행사도 대대적으로 개최되는 등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고종 23(1236) 대몽항쟁의 의지를 다지기위해 팔만대장경 판각작업에 들어가 고종 38(1251)에 완성한다.

현재 강화에는 개성에 있던 사찰과 명칭이 같은 사찰이 다수 있는데, 묘통사, 법왕사, 봉은사, 왕륜사, 흥왕사 등이 강도지등 각종 문헌에서 확인된다.

개풍군 봉명산에 있던 묘통사(妙通寺)는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을 개설하여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고, 고려의 많은 왕들이 행차하여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강화 마니산에도 묘통사지가 있다. 개성시 연경궁 근처에 있던 법왕사(法王寺)는 고려 태조 2년에 창건된 개경 십찰 중 하나이며, 팔관회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 송악산 아래에는 강화천도 후 창건된 법왕사지가 있다. 개성시 태평동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고려 광종 2년 태조의 원찰로서 창건된 사찰이다. 여러 명의 국사와 왕사가 머물며 연등회를 개최하던 곳이었다. 현재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 일대가 봉은사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도 1234년부터 개경으로 환도하기 이전까지 연등회가 개최되었다. 왕륜사(王輪寺)는 개성시 송악산 기슭에 있던 사찰로서 태조 2년 창건된 개경십찰 중 한 곳이며, 교종승려들의 승과시험을 치르던 곳이다. 강화의 왕륜사지는 현재 하도면 마니산 서쪽 기슭에 있다. 그리고 개성시 개풍군 덕적산 남쪽에 있던 흥왕사(興旺寺)는 현재 강화 마니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중 개성 흥왕사는 고려 최대사찰이자 고려 문종의 원찰이었다. 1065년에 완공되었고,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주석하면서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속장경을 간행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절 안에 대장전을 건립하여 초조대장경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개성에 있던 사찰과 사명이 같은 강화의 사찰들은 이름뿐 아니라 성격이나 역할도 유사한 점이 많다. 강화 흥왕사 또한 이러한 전통을 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도 이후 강화도에는 선원사를 건립하여 재조대장경을 보관하였다고 전하나, 흥왕사도 강화도의 대장경 판각 및 인경, 보관과 관련되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현재 흥왕사지는 마니산 남록에 위치하고 있다. 체험학습장과 흥왕초등학교 사이길 상부에 있는 전원주택 단지 북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해발 115m정도 되는 지점에 석축 및 석탑관련 부재가 산포되어 있다. 절터는 마니산 정상에서 남서쪽의 좌우 계곡부 사이에 형성되어 있으며, 사역 주변 계곡부에는 크기 2~5m내외의 대형 석재들이 산재되어 있다.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은 알려지지 않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1347년 고려 충목왕이 선원사, 왕륜사, 흥왕사 등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도량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흥왕사지 유적의 전체 범위는 동서 60m, 남북 50m 내외이다. 범위 내에는 남서쪽을 향하고 있는 4기의 석축이 3단 구성으로 조성되어 있다.

최상단 석축(석축1)은 상부에서 흘러내리는 유실토를 방지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석축은 90~100cm 규모의 판형 할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잔존 높이는 40cm 정도이다. 상단 석축(석축2)은 석축1의 남쪽 12m 지점에 조성되어 있으며, 30~40cm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였다. 현재 일부에서만 총 길이 13m 정도 잔존하지만 잔존 유구의 연장선을 통해 추정해보면 전체 길이는 약 34m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석축2 상부 평탄지(상단)에는 건물의 기단으로 추정되는 장대석렬이 일부 확인된다. 중단 석축(석축3)은 상단 석축의 남쪽 25m 지점에 조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자형이다. 80~100cm 크기의 판형할석을 이용하였다. 석축3 상부 평탄지(중단) 중앙에는 석탑부재 5매가 남아있다.

석축이 확인된 곳의 동서 방향에 계곡부가 형성되어 있고, 계곡 너머로는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므로 좌우 사역 범위는 현재 잔존 범위인 60m 내외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남북방향에 대해서는 북쪽 종단부는 현 석축부 상부가 급경사 및 큰 자연석이 산재되어 있어 잔존 구역 내를 범위로 설정할 수 있으나, 남쪽은 능선 하부 마을에서의 진입과 비교적 넓은 면적의 하부 평지를 고려해 보았을 때 예불 공간외의 생활 혹은 부속 공간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석탑부재 주변에는 건물 관련 부재로 판단되는 방형 치석재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각 치석재들은 기단부재로 보이는 길이 120~174cm 정도의 장방형 석재 3기와 초석으로 추정되는 75cm 크기의 정방형 석재 1기이다. 하단 석축(석축4)은 석축3의 남쪽 16m 지점에 조성되어 있으며, 석축3과 같이 전체적으로 자형이다. 100~150cm 크기의 판형 할석을 이용하였다.

흥왕사지는 현재 조사구역 내에 산포되어 있는 기와편 등의 유물과 문헌을 통해 고려시대 후기에는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석탑은 치석 특징을 보았을 때 고려 후기 이전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전부터 존재했던 사찰이 고려 후기 강도천도기를 통해 왕실과 관련되면서 대규모로 중창되어 현재 볼 수 있는 유적의 범위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 지리지에서는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으므로 늦어도 조선 초기, 혹은 원간섭기에 강도의 시설이 파괴되는 시점에 폐사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 여러 조사에서 선원사, 왕륜사와 더불어 강화도 내 중요 사지로 판단되고 있는 흥왕사지는 유구의 잔존 상태가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역과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식생에 의한 훼손 우려도 높다. 하루빨리 정비계획을 세워 사람과 자연에 의한 훼손으로부터 유적을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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