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군은 어떤 무기를 사용했을까?

73주년 광복절 특집

국방홍보원 / 작성일자2018.08.14. 

이번 여름은 유난히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실외 활동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날씨는 뜨겁다. 더욱이 8월은 우리 광복절이 있어 더 뜨겁다. 국권을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하여 그 투쟁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긴 독립군은 1945, 해방의 그 날 까지 그 활약을 계속 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독립군들은 어떤 무기를 썼을까? 나라를 잃고 해외를 떠돌며 제대로 된 무기의 공급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야말로 탄알을 한 발 한발 세면서 사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독립군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 아시아 최강 일본군과 눈물겨운 사투를 했다. 오늘은 우리 대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에 대해 알아보자.



1907,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극동 특파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프레더릭 매켄지(F.A. Mckenzie)가 양근군(오늘날의 양평군)에서 만난 의병들을 찍은 사진. 항일 무장 투쟁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사진이다.

먼저 우리가 주권을 잃기 직전인 한말의 무기부터 살펴보자. 한말의 보병 무기는 꽤나 여러 종류의 무기가 섞어있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보병용 소총의 경우도 통일이 안 되어있었다. 당시 가장 보편적인 개인화기는 천보총이라고 불린 화승총이었다. 조총(鳥銃)보다 성능이 뛰어난 총으로 1725(영조 1)부터 개발하여 1737년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당시 보통의 화승총 사정거리가 200m 내외였음에 반해 천보총은 무려 1,000m 가 넘는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천보총은 현존하는 것이 없어 자세한 형태나 구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화승총은 화승총이다. 일단 계속해서 화승(심지)에 불을 붙여놓고 있어야 한다는 점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고, 비라도 오면 화승총은 사용할 수조차 없는 물건이었다.

그 한계가 분명한 화승총은 19세기 말엽부터 뇌관식 소총으로 교체되었다. 뇌관식 소총은 화승 대신에 간편한 뇌관 캡으로 탄환을 발사할 수 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최신식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가 귀찮게 생각한 여러 종류의 뇌관식 소총도 상당수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후장식 소총은 말 그대로 탄환을 뒤쪽, 그러니까 방아쇠 근처에서 장전할 수 있는 총이다. 앞선 화승총이나 뇌관식 소총은 탄환을 총구로부터 장전해야했기 때문에 장전시간도 오래 걸렸고, 반드시 서있는 상태에서만 장전이 가능했다.

화승총 시대에 있었던 조선은 거저 주는 구식 뇌관식 소총만 해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뇌관식 소총은 조선 자체에서 생산한 것도 있었을 정도로 이 무렵에는 완전한 주력 소총이 된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세계는 후장식 탄피소총이 대세였다. 한말 신식군대의 상징이었던 별기군은 일본군으로부터 미제 스나이더 소총을 지급받아 썼다. 이 스나이더 소총은 당시로서는 막강한 화력의 소총이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도 스나이더 소총을 사용했는데, 이 소총 때문에 동학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바 있다.

당시 그런대로 신식인 스나이더만 넘겨 준 것이 아니었다. 이 무렵 넘겨준 총기 중에는 그 시기 이미 구식이 되어 버린 독일제 게베어71 소총도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한말의 무기들은 경술국치 이후 대부분 일본군에게 압수되었지만, 그래도 상당수가 독립군의 손에 흘러들어가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

 

고미술품 소장가인 '체스터 장' 박사와 '완다 장'씨 부부가 한국 정부에 기증한 '천보총'으로 추정되는 '희귀 소총'의 실물 모습이다. 출처 : 중앙일보

 

한말 호랑이 사냥꾼들이 쓰던 뇌관식 소총. 당연히 조선군에서도 뇌관식이 쓰였다.

 

한말, 조선군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뇌관식 소총. 한국 근대사의 사료가 너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스나이더 탄피식 단발소총. 이전의 화승총이나 뇌관식 소총 따윈 비교가 힘든 조선으로써는 신식 총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세계는 이미 5연발 볼트액션 소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실 독립군의 무장에 관해서는 정보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일본군의 무기를 노획해 사용 한 정도로만 알고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 제작된 일송정 푸른 솔은이라는 영화에 보면, 독립군이 자체적으로 소총을 제작하는 과정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별다른 생산시설이 없었던 독립군이 정밀도를 요하는 총신과 노리쇠 기관부를 만들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아무튼 일본군의 병기를 노획해 쓰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없는 살림에도 독립군은 필사적으로 무기를 사들였다. 특히 독립군은 대한광복군으로 변화하며 일본군의 노획장비 이외에도 소련, 체코, 그리고 독일제 총기 등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독립군이 활동하던 초기는 러시아 혁명 이후 적백내전의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사용되던 구식 무기들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중국 국민당 군에게서 다수의 독일, 혹은 체코제 무기를 보급 받은바 있었다. 김좌진의 북로정서군은 적백내전 때 연해주로 퇴각하던 백군 소속 체코 부대가 총기와 탄약 등을 매각해 줘서 무기를 확보하기도 했다.

소총으로는 구식의 독일제 Gew71 단발식 소총과 러시아제 베르단 단발소총, 프랑스제 그라스 단발소총, 일본제 무라타 단발소총에서부터 독일제 Gew98 5연발 소총, 영국제 엔필드 소총과 소련제 모신나강 5연발 소총, 일본군의 5연발 38식 소총, 그리고 미국제 스프링필드 5연발 소총까지 등 그야말로 입수할 수 있었던 소총은 모두 입수해 사용했다. 따라서 독립군은 제식무기가 통일되어야 하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전투는 수행이 어려웠다.

 

위에서부터 베르단, 게버어71, 무라타, 그리고 그라스 소총.모두 단발식 소총이다.

 

위로부터 게베어 98, 모신나강, 38, 스프링필드 소총이다. 이들 모두 5연발의 볼트 액션식 소총인데, 독립군과 광복군은 이런 여러 종류의 잡다한 소총을 섞어 썼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권총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일단 소총에 비해 그 종류가 많지 않았다. 탄약도 소총에 비해서 비교적 구하기 쉬웠고, 호환성 또한 소총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가장 많이 쓰인 권총은 독일제 마우저 자동권총이었다. 이 마우저 자동권총은 오리지널 독일뿐만 아니라 중국, 스페인 등지에서 카피품이 마구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비교적 구매와 탄약의 보급이 수월했다. 이밖에도 마우저 리볼버와 영국제 엔필드 리볼버, 노획한 일본제 남부 14식 자동권총, 그리고 소련제 토카레프 권총 등을 사용 했다. 

 

좌측 위 마우저 자동권총부터 시계방향으로 엔필드 리볼버, 남부14, 마우저 리볼버이다. 그나마 권총은 보급의 사정이 좀 나은 편.

 

토카레프는 1940년대 이후에 주로 공산계열 독립군 조직에서 많이 쓰였다.

독립군에게 대포 등의 중화기는 없었다. 기껏해야 기관총이 중화기의 전부였다. 하지만 소총조차 탄약부족에 시달리던 독립군이 기관총을 속 시원하게 사용한 사례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여러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독립군이 기관총을 그나마 운용했던 전투가 청산리 전투라고 알려져 있다. 이 때 쓰인 기관총은 당시 국제표준기관총이었던 맥심 기관총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제 루이스 경기관총, 그리고 노획한 일본제 96/99식 경기관총 등 여러 가지가 쓰였지만, 그 숫자는 그야말로 한줌에 불과했다.

 

국제표준이었던 맥심 기관총. 보유한 숫자가 부족했다.

 

프랑스제 루이스 경기관총. 독립군이 이 총을 썼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도 중국에 대량 수입된 물건을 구입한 듯.

 

일본제 96/99식 경기관총. 체코제 Vz.26 경기관총의 카피품 이다.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고 광복군으로 개편된 독립군은 대규모 전투 보다는 히트앤드 런 방식의 유격전이나 요인 암살 등의 공작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쓰인 무기는 중일전쟁에서 쓰인 무기였다. 당시 광복군은 중국에 있으면서 중국에게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국군이 쓴 무기를 썼고 이 중에선 당연 노획한 일본군의 무기도 있다. 미국 OSS와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할 때는 중국에 지원받은 것과는 별도로 미국제 그리스건과 M1 카빈 등을 받기도 했다.

 

OSS(미 전략사무국(Officer of Strategic Service) - 현재 CIA의 전신) 소속 광복군의 모습. 모두 M1 카빈을 들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 독립군의 무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혹자는 우리 독립군과 광복군이 사실상 우리나라의 독립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종전 직후 일본은 시종일관 줄기차게 한국과 일본은 하나의 나라로써 합법적으로 병탄된 나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는 여러 가지 원인 중에 바로 광복군의 존재가 있었다.

같은 나라인데 왜 한국은 무장조직을 만들어 그토록 격렬하게 일본에 대항 했는가?’

이 질문에 일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기사 및 사진 제공 : 이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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