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일이 있었건대 山이 저리 타는 것이냐! 신문에서 퍼온 역사

무주 제1경 나제통문

나제통문은 1925년 일제강점기 무주 금광 개발을 위해 뚫은 인공터널이다. 터널 개통과 함께 설천 위로 다리가 놓이고 30번 국도가 산을 관통했다. 나제통문이라는 이름은 1963년 관광지 개발을 위해 명명됐다. 원래 이름은 '기니미굴'이었다. 삼국 통일 전 국경이 이 통문이었다는 주장은 맹랑하다.

1947년생인 오재성은 나제통문 동쪽 무풍면에 살았다. 그가 말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집이 통문 동쪽 이남 마을에 피란 가서 살았다. 이남 마을 이름은 그때 기니미 마을이었다. 석모산에 굴이 있었는데 다들 기니미굴이라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찢어지게 가난하고 길도 제대로 없는 무주에 관광업 바람이 불었다.

천하 오지라, 잘 보존된 구천동 계곡을 관광지로 개발하자는 이야기였다. 민간에서 구천동 아름다운 곳곳에 이름을 붙이고 길을 냈다. 1961년 명승고적 33군데를 골라 이름을 붙였다. 지도를 만들어 그 명승지마다 이름 적은 종이를 만들어 핀을 꽂았다. 사진을 찍고 관광지도를 다시 만들었다. 무주구천동 33경은 그때 만들어졌다. 1962420일 구천동 33경이 당시 교통부가 주관한 대한민국 10대 관광지에 선정됐다.

그때 그 종이판을 만들고 핀을 꽂은 사람이 오재성이었다. 그가 말했다. "가난했으니까, 무슨 역사의식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었다. 기니미굴이라고 하면 누가 오겠는가. 그냥 관광객 모으려고 근사하게 나제통문이라고 이름 붙인 거지. 게다가 나는 어렸으니까 어른들한테 뭐라 할 처지도 아니었고."

세월이 갔는데, 이상하게 갔다. 돈벌이를 위해 만든 이름이 역사가 되더라는 것이다. 국정 국사 교과서에 당당하게 나제통문 사진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오재성이 말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1980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갔다. 내가 이름 붙인 거다 그러니까, 아니래. 삼국시대 것이래. 그래서 뚫은 것이 일제강점기 뚫었고, 목격한 사람도 다 있다, 그렇게 난리를 치러서 1990년대 들어서야 교과서에서 사진이 빠지게 된 거지."

'일제 때 산을 뚫어서 통로가 되었다(日治時鑿山通道).' 1957년 발간된 무주군지 적성지 기록이다. 구천동 33경이 지정되기 전 기록이다. 그런데 1967년 다시 만든 적성지 속지(續誌)에는 기록이 바뀐다. '동굴 입구는 옛날 신라와 백제 국경이니 당시 무기 쟁탈전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천여 년이 지나자 굴 동쪽과 서쪽 백성들은 풍속과 관습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순수하게 관광으로 먹고살기 위해 만든 33경 첫 경치가, 그 기이한 풍광과 전설이 뒤섞이며 역사가 되어버리고, 급기야 고등학교 교과서까지 진실된 역사라 인정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21세기 지방자치단체들이 속칭 '스토리텔링'이라는 명분을 들먹이며 있지도 않은 허구를 진실인 것처럼 안내판에 적어내리는 행위와 똑같다.

그런데 오재성이 말한다. "정말 역사로 기록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정말 우리 고장을 위해서, 우리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했던 일이다."

그런데 또 오재성이 말한다.

"군청에 이야기했다. 이거 잘못된 거다. 이러더라, 알지만 관광이에요, 근데 여기가 이 기니미굴이 경상도에서는 수학여행 길이에요, 백제를 평정할 때 김유신이 지나갔다 해가지고. 그런데 그게 1925년도에 뚫었다고? 그러면 어떡해요, 안 된다고 그래." 그가 말을 잇는다.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해라? 이게 가치관의 혼선이지. 고쳐야지. 그런데 아직도 나제통문이라고 하니까, 아 역사 왜곡이라는 게 바로잡기가 어렵구나. 40년밖에 안 됐는데도 바로잡는 데 40년이 아니라 400년이 걸리겠구나, 그런 생각. 우리가 후손들한테 뭘 남겨줄 건가. 계속 거짓을 남겨줄 순 없지 않나. 거짓에서 탈피를 해야지." .

-조선일보, 2018.01.24., 박종인 기자.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