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공 손돌설화' 현장 묘사, 좁은 물목에 사당 … 안전기원 사랑방

-인천일보, 2014.12.12. 이영태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1765년 이규상이 인천 일대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지방의 현실과 지방민의 삶, 여성과 남성의 복식, 상인들의 분주함, 갯벌의 어로작업, 염전의 모습, 용유도 풍경, 무속의 현장, 풍류의 모습, 지방의 역사와 유적, 지방민에 대한 애정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규상이 둘러본 공간은 문학산 주변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문학산 주변인들을 통해 들었던 '손돌설화'를 현장에까지 가서 확인하고 그것을 시로 남겼다.

 

孫石墳前潮打垠(손석분전조타은)

손돌의 무덤 앞에 물결 벼랑에 부딪히고

精靈竟作海中仙(정령경작해중선)

정령은 마침내 바다의 신선이 되었네

船人到此齊虔告(선인도차제건고)

뱃사람들 이곳에 이르러 정성껏 고사 지내지만

不盡風波禍福人(부진풍파화복인)

바람과 파도 그치지 않아 화와 복을 주네

 

작자는 손돌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답사를 했다. 뱃사공 손돌이 억울하게 죽자 뱃사람들은 그의 원혼이 격한 풍랑과 거센 바람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물살이 거센 것은 물목이 좁아진 지형적 탓이겠지만 뱃사람들은 그것을 초월적 존재와 결부해 이해했기에 고사를 지내며 배를 운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禍福人(화복인)'에서 '()'이 원인을 가리키는 '()'이라면 사람에게 복이나 화를 주는 대상은 고사가 아니라 '不盡風波(바람과 파도 그치지 않다)'였던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배를 몰던 뱃사공이 상대방의 오해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 후, 뱃사공의 판단이 옳았다는 게 증명됐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던 뱃사공이 죽자, 주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게 '손돌설화'이다.

손돌이야기는 고려시대 공민왕과 고종으로 설정돼 있지만, <고려사>, <세종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손돌항(孫乭項)이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에 편찬된 <만기요람>, <대동지지>, <여지도서> 등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손돌의 일화를 특정 왕과 관련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음력 1020일을 전후해서 부는 바람과 추위를 '손돌뱅이 추위''손사공 얼어죽은 날' 등으로 부르는 것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는 점에서 특정 지역에 한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엄청시리 춥는 기라. 고래가지고 인자 제일 춥으모 우리가 전해 오는 말이, 인자 시월 초하릿날이면은 인자, 걸음강 손사공 빠져 죽은 날이다"(<한국구비문학대계>, 1982, 경남 의령 지정면)로 진술하는 데에서 '걸음강'은 한자 표기 '岐江(기강)'으로 '물살이 험한 곳' 洛東江南江의 합수지역을 지칭한다.

물살이 험한 합수지역에 빠져 죽은 자가 손사공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무엇보다 <용비어천가>'손돌'이란 지명에 '窄梁(착량)'으로 한자가 부기돼 있어 '좁은 물목'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어학적으로 보더라도 '''좁다'의 뜻이다. 예컨대 '솔다''너비가 좁다'의 의미로 '솔나무''잎이 좁은 나무'이고 '오솔길''외지고 좁은 길'이기에 그렇다. '명량(鳴梁)' 해협을 '울돌목'으로 부른 것도 유사한 경우이다. '좁은 물목'의 물살은 소용돌이치기에 인명 사고가 빈번했을 터, 망자(亡者)의 원한을 감안해 그것이 물살이나 추위로 구현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배 운항의 안전과 온화한 바람과 파도를 바라는 마음이 결집된 게 '손돌설화'였던 것이다.

죽은 영웅의 무덤이 강을 오르고 내리는 여행객들이 볼 수 있는 절벽 저 끝 쪽에 선명하고 분명하게 서 있었다. 요새(要塞)로 사용할 목적인 담이 절벽 위에 있고, 그 안쪽에 무덤이 있고 작은 둔덕 위에 손돌의 사당이 있었는데, 그것은 8평방 피트의 공간에 높이 7피트의 이엉으로 덮여진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된 보잘 것 없는 구조물이었다. 말하자면, 다소 서툰 인물화가 손돌의 초상으로 의도된 벽면 위에 칠해져 있었는데, 그 밑에는 소원을 비는 봉헌물을 담아두기 위한 긴 선반이 있었다. 이처럼 사당 역할을 하는 구조물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1895)

개항기, 외국인이 손돌사당을 방문한 경험을 영어로 작성한 문건이다. 배를 타고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는 점과 손돌사당의 규모와 내부의 모습 등을 기록해놓았다. 하지만 '좁은 물목'이 전국에 산재하며 그런 공간에서 인명사고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초월적 존재에 기대 피하려는 일련의 마음이 망자를 위한 제사였던 것이다. 어찌 보면 손돌은 사람이기보다는 '좁은 물목'이기에 손돌사당에 모신 대상은 '좁은 물목'이었던 셈이다. 이규상은 그것을 간파하고 사람에게 복이나 화를 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不盡風波(바람과 파도 그치지 않다)'였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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