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 김상용 선생 歷史廊

바라건대 자신을 통렬히 꾸짖으시어 뉘우치는 뜻을 분명히 보이소서.”

누가?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한 말이다. 누구에게? 인조 임금에게. 인조가 신하들의 직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외려 직언한 신하들을 해코지한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대단하다. 임금 자신을 꾸짖고 뉘우치라고 그것도 통렬하게 반성하라고 말할 수 있는 배포가 놀랍다. 에두르지 않는다. 그야말로 돌직구다. 놀랍기는 임금도 마찬가지다. 다 듣고 임금이 한 말, “유념하겠다.”

임금이 사실상의 사과를 한 것은 군권(君權)이 약하고 신권(臣權)이 강해서만이 아니다. 김상용의 직언이 결국은 임금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간곡한 충언임을 알아서이다. 높은 벼슬을 두루 거쳐 왔지만, 김상용의 집은 가난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권세를 이용해 얼마든지 부()를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김상용은 그러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무능했지만, 그만큼 맑았고 깨끗했고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다. 임금이 모를 리 없었다.

20132, 국회에서 새 정부의 장관후보자들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야당 의원들은 몇몇 장관후보자들에게 5·16을 군사 정변으로 보는지, 혁명으로 보는지 물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장관 후보자는 답변하지 않을 수 있도록 양해를 바란다고 했다. 차라리 혁명이라고 주장했다면 얄밉지나 않았겠다. 진정으로 대통령에 대한 충정이 있다면 군사 정변이었다고 말해야 했다. 쿠데타라고 해야 했다.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딸도 잘못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아버지 일을 교훈 삼아 더 잘할 수 있다.”는 식으로라도 답변했다면 그럴 듯했을 것이다.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어도 들어줄 만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과 나라를 위해 답변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회피한 것이다. 이미 꿀리는 게 많아 당당함을 잃은 그들이었다. 앞으로도 김상용식의 충언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김상용이 강화도 남문에서 순절한 날, 실록은 그를 이렇게 적었다.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인하여 성의 남문루에 올라가 앞에 화약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

김상용의 자는 경택이고 호는 선원으로 김상헌의 형이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국가가 위망에 처하자 먼저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강도의 인사들이 그의 충렬에 감복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김상용은 난리를 피해 강화도 선원(仙源)으로 와서 머물렀었다. 강화는 김상용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이를 계기로 선원이라는 호를 쓰게 됐다고 한다. 지금 강화읍 남쪽과 맞닿은 지역이 선원면이다. 사관은 김상용이 정승으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고 썼다. 그런데 혼탁한 세상에서 한 시대의 모범이 됐다는 자체가 소중한 업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숙종, 강화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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