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발 중 49발 명중’ 정조 활쏘기 비법 자랑 친필 나왔다 신문에서 퍼온 역사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문의 법도여서내가 ‘49발 맞히면 그 때 가서 고풍(古風)을 청하라했는데 오늘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수와 맞아 떨어졌기에.”

1792(정조 16) 1030일 정조가 창경궁 춘당대에서 활쏘기 행사를 펼친 결과 50발 중 49발을 과녁에 맞혔다. 점수는 72()이었다. 과녁을 맞히면 1, 그 중에서도 정곡(과녁의 한가운데)을 맞히면 2점이었으므로 49발 중 23발이 정곡을 꿰뚫은 것이다. 정조의 화살 49발이 과녁에 꽂히자 고풍(古風)이요하는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고풍은 활을 명중시킨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즉 신하가 먼저 임금이 쏜 화살의 점수를 자세하게 적은 고풍지를 올리면 임금은 하사하는 선물명을 쓰거나 후과(後課·선물은 나중에 정하겠다는 뜻)’를 써서 내려주었다. 때론 신하가 올린 고풍에 즉석에서 임금의 느낀 바를 쓰기도 했다.

활쏘기는 가문의 법도다

교지 연구가인 김문웅씨(79)는 바로 그 날 정조가 화살 50발 중 49발을 맞힌 뒤 검교제학 오재순(1727~1792)고풍에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하며 손수 써준 어필을 6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김문웅씨가 공개한 자료는 <정조실록> 1792(임자년) 1030일자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재순이 올린 고풍지에는 정조가 쏜 화살 점수가 순()별로 차례로 기록돼있다. 임금이 쏜 유엽전(柳葉箭·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화살) 10(·1순이 5발이므로 50) 49발을 맞혔고 점수는 72()이라 했다.

맨처음 5발을 쏜 제1()에서는 관(·과녁의 한가운데 정곡)3, (·주변)2발 맞아 8()을 기록했다. 2순은 관에 2, 변에 3발 맞아 7()이었다. 이렇게 제10순까지 정조가 과녁의 어떤 부분을 맞혔고 각 순별 점수가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록돼있다. 정조가 오재순의 고풍밑부분에 써준 어필의 내용도 그 날짜 <정조실록>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글씨를 본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서체반정을 추구한, 순후하고 반듯한 정조의 글씨가 맞는 것 같다고 밝혔다.

정조는 오재순의 고풍에 손수 쓴 글에서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射藝卽我家法也)인데 이후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차례 10(50)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고 자랑했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때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30)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

정조가 손수 써준 어필 소감문.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법인데(射藝卽我家法也)오늘 명중한 화살 수(49)가 약속했던 그 수와 맞아떨어졌기에문방 용구와 마첩 등을 제신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전에 했던 말을 실천하려는 것이었다.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다. <시경>덕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 바로 그 뜻이다라 했고, 끝에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是日燈下漫題)”는 내용도 담겨있다. 맨 왼쪽에 반숙마(길들이지 않은 말) 1을 하사한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정조는 규장각 관리들에게 반숙마(길들이지 않은 말) 1필씩을 하사하고 검서관(규장각 5) 이하 관리에게는 차등있게 선물을 내렸다. 정조는 참석자 중 맨머리에 있던 오재순에게 특별히 임금의 소감문을 써준 것으로 보인다. 김문웅씨가 공개한 고풍지에는 오재순에게 반숙마 1필 하사를 약속한다는 증서(馬帖)와 함께 정조가 손수 써준 어필 소감이 보인다. 정조는 글의 말미에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是日燈下漫題)”는 낙관을 썼다. <정조실록>에도 보이는 글귀다. 정조의 글 중 특히 주목되는 내용이 있다.

“(경들이)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다. <시경>에 이르기를 ()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고 했고,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는데 바로 그 뜻이다.”

김문웅씨는 활쏘기 후에 고풍(선물)을 내림으로써 덕을 베푼 정조는 여전히 세력을 떨치던 노론에게 <시경>을 인용하면서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서 임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조는 왜 1발은 놓쳤을까

그런데 <정조실록>과 이 오재순의 고풍, 박제가의 어사기(御射記)’에 기록된 정조의 활쏘기 성적을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정조는 179210~12월 사이 춘당대로 출근하다시피 해서 활을 쏘았는데 50발중 49발을 맞춘 회수가 10회나 된다. 특히 1227일에는 화살 100발을 쏘아 98발을 맞히는 기염을 토한다. 왜 만점(50발 명중)은 없는 것일까. 김문웅씨가 공개한 오재순의 고풍지에도 정조의 마지막 발(50번째) 점수가 공란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즉 정조는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고,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홍재전서>)고 했다. 박제가(1750~1805)당시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임금의 활쏘기 솜씨에서 50대 중 1대를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 했다고 전했다.

이 대목에서 박제가는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랬다. 정조가 밤새도록 책만 읽고, 보고서만 읽은 공부중독, 일중독의 군주로 알기 쉽지만 절대 문약(文弱)에 빠진 임금이 아니었다.

다산의 북영 입소 훈련사건

정조는 ()과 무()의 병용이야말로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문신들에게도 무예를 연마하라고 다그쳤다. 정조가 그토록 총애했던 다산 정약용에게 굴욕을 안긴 사건이 1791(정조 159) 일어난다.(다산의 <여유당일기> ‘북영벌사기’) 이날 규장각 신하들을 대상으로 열린 50발 활쏘기에서 다산 등 7명이 단 4발도 맞히지 못했다. 그러자 정조는 문장은 좋지만 활쏘기를 모르면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니 그대들을 북영(北營)에 잡아놓고 하루에 20(화살 100)씩 쏘아서 매 순마다 한 발씩은 맞힌 뒤에야 풀어주겠다고 명했다. 낙제점을 받은 다산 등 7명에게 10일 간의 북영 입소를 명했다. 지금으로 치면 해병대 캠프 입소 유격훈련이 아닌가. 게다가 100개 중 최소한 20개는 맞힐 때까지 풀어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북영(훈련도감 본영)으로 끌려간 다산은 이때의 생고생을 생생한 필치로 토로한다.

벌로 북영에 가서 활을 당겨야 했다. 활이 망가지고 화살은 굽었으며, 깍지(활을 쏠 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끼는 기구)는 떨어져 나갔다. 팔찌(활을 쏠 때 왼팔 소매를 걷어 매는 띠)는 질질 끌렸으며, 손가락은 부르트고 팔뚝은 부어올랐다.”

다산은 그렇게 10일간 훈련하고 나서야 겨우 북영에서 풀려났다. 다산으로서는 섭섭할만 했다.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정조가 안면몰수하고 합숙유격훈련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캠프에 다녀온 다산은 오히려 난 행운아였다고 정조의 처사를 고마워했다.

옛 사람들은 육예(六藝)를 갖춰야 명색이 유자(儒者)라 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문()을 귀히, ()를 천하게 여기게 됐다.”

다산은 “360일 중에 단 10일만 훈련해도 이 정도인데 여태껏 뭐하고 있었을까하면서 임금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배웠으니 이것은 우리의 죄라 자탄했다. 이번에 공개된 오재순의 고풍지에 담긴 정조의 활쏘기 점수와 어필의 내용, 그리고 박제가의 어사기’, 다산 정약용의 북영벌사기를 살펴보면서 문예군주로 알려졌던 정조가 무예군주의 면모를 뽐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2019.02.07.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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