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소확행’은 말이다 이젠 鄕愁, '교정에 서서'


아들, 잘 있는가. 창을 등지고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햇살 덕분에 등이 따듯하여 추위를 잊는다. 여름 햇살은 그리도 밉더니 겨울 햇살은 이리도 고맙구나. 아빠에게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단다. 취미라고 말하고 보니 쑥스러운데 사실은 TV 드라마 보기란다. 직장 나갈 때는 거의 보지 않던, 볼 수도 없었던 연속극을, 퇴직한 지금은 잘도 본다. 어떨 때는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 드라마까지 다 본방사수할 때도 있단다. 의외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요즘은 ‘SKY 캐슬을 흥미 있게 보고 있다. 자식을 명문대 보내려는, 대한민국 상위 0.1% 가정의 노오력을 기둥으로 이런저런 생각거리를 엮어나가는 이야기란다. 당연히 꾸며진 그리고 과장된 이야기이지만, 그 행간에서 작금의 현실도 읽히는구나. 그 드라마의 주인공 아줌마들처럼 오늘도 자녀 입시에 올인하는 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선배 입장에서.

올인하지 마세요. 자녀에게 너무 밀착하지 마세요. 한 줄기 바람이 흐를 정도만큼이라도 여백을 두세요. 너무 끌어안으면 고슴도치 모녀처럼 서로를 아프게 찌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녀의 인생이 중요하듯, 당신의 인생도 중요합니다. 누구의 엄마로 빛나려 하지 말고, 그냥 당신 자신을 빛나게 하세요. 한 번쯤 거울 앞에 서서 자문해보세요. 지금 내가 아이를 위해서 이러고 있나. 나를 위해서 이렇게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녀가 명문대 합격하면 기분 좋습니다. 주위의 부러운 시선에 으쓱하게 되지요. 그러나 한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허망할 만큼 짧습니다. 명문대가 좋은 직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는 확률이 조금 높은 정도이지요. 다행히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고 칩시다. 이제부터는 학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정받고 승진하면서 커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성입니다. 따듯한 인간미를 갖춰야 진정으로 인정받습니다.

싸가지 없는 1은 직장에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동문이라도 끌어주지 않습니다. 자녀의 성공을 원한다면, 대학입시 결과로 모든 것이 끝날 듯한 조급증을 버리고 조금 멀리 보셔요. 아이의 인성교육부터 신경 쓰세요. 그게 진짜 자녀 사랑입니다.

아들, 어쩌다 보니 너에게 쓰던 편지가 다른 분들에게 향했구나. 다시 너에게 간다. 네가 대학 졸업한 지 어느덧 삼 년이 다 돼가네. 취업했고, 일을 하고, 돈도 조금 벌고 있으니 다행이다. 비정규직의 자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어서 조금 아쉽다. 정규직을 박차고 나와 비정규직의 길로 들어선 너의 결정도 사실은 여전히 아쉽다. 그래도 네가 원하던 방송국 일을 하고 있으니 아빠는 만족한다. 너의 결단을 존중하고 응원한다.

지난번에 집에 왔을 때, 너는 소확행을 말했었다. 그래 요즘 소확행이 유행이더라. 용흥궁공원에서 몇 번 축제 공연이 있었는데, 그 행사 명칭도 소확행이더라. ‘작지만, 확실한 행복좋은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작품에서 처음 쓴 말이라고 한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으며 느끼는 행복감, 이런 것이 소확행이라고 했다. 무라카미는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을 보면서도 작은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아빠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세태가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꺼림칙하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소학행을 처음 말할 때의 무라카미는 이미 충분히 성공한 중년이었다. 부와 명예가 그에게 있었다. 얼마든지 고급스러운 음식을 돈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쩌다 손으로 빵을 찢어먹으며 느끼는 행복, 그게 소확행이었다.

가진 자의 여유에서 시작된 소확행이 어려운 이들의 자기 위안으로 이 땅에 널리 퍼진 것 같다. 위안은 필요하다. 별것 아닌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정신 건강에도 좋은 일이다. 다만 소확행이 패배주의의 다른 포장이 아닐까 하는 우울한 생각도 드는구나. 만약 체념과 현실 안주를 정당화하는 소확행이라면, 그건 별로다. 힘을 얻고 더욱 분발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소확행이었으면 좋겠다. 아들아 너도 가끔 소확행을 즐겨보렴. 그러나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너를 위한 비일상의 이벤트정도였으면 한다.

아들아 조급해 말고 속상해 말고 앞으로 가라. 너의 이익만을 탐하지 말고 함께 가라. 겨울날 햇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닦아라. 그러면 꿈도 곧 이루어질 게다. 아빠는 이제 종이배처럼 살고 싶다. 그냥 흐르는 물에 순응하며 흘러가고 싶다. 너는 연어 같은 뜨거움으로 살아라. 힘들면? 쉬어라. 연어도 힘들면 쉴 거다.

-<사학연금>, 2019.04.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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