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강화학파 사랑방

이종걸 의원 강연

19108,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을 통분한 나머지 자결한 매천 황현은 자결하기 전에 강화의 영재 이건창 묘소를 찾아와 한 줄 시를 읇습니다.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 無痛悲獨臥(무통비독와)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 在日已離群(재일이이군)

영재 이건창은 병인양요 때 자결한 사기 이시원의 손자인데, 영재와 절친했던 매천 황현도 그와 같은 최후를 선택합니다. 한일 강점에 이르러 죽는 사람 하나 없다면 앞으로 후대에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냐며 음독자살하는데, 매천의 죽음을 지켰던 동생 석전 황원도 해방되기 전에 저수지에 몸을 던져 죽습니다.

영재 이건창은 15세 진사과에 소년급제한 천재로 189847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명성이 조선 천지에 알려진 인물입니다. 영재는 정말 뛰어난 분인데, 가만 보면 뛰어난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강화에서 양명학의 흐름이 하곡 정제두에서 100여년이 지나 영재 이건창에 와서는 활짝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는데 몸이 약해서 47세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재 이건창은 초시나 대과에 합격한 신진기예들과 함께 마포 서강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풍류와 낭만을 나누던 시회를 자주 열었습니다. 이곳에 영재의 소개로 매천이 참석하였답니다. 매천은 영재와 깊은 교유를 가지던 분이었는데 매천야록에 의하면 매천이 과거에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 부정부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해요. 그런데 영재 이건창이 심사관에게 말해서 공정하게 시험을 치르게 하여 그 다음해에 수석 합격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매천이 영재 묘소를 다녀가고 나서 자결할 때쯤 영재 이건창의 아우인 경재 이건승과 강화학파 동료인 기당 정원하, 문원 홍승헌 선생이 망명을 떠납니다. 사촌동생인 난곡 이건방은 몸이 약하기도 했고, 양명학을 이어가야 해서 국내에 남습니다.

경재 이건승 선생이 만주, 횡도촌이라는 곳이죠. 거기로 떠날 때가 191010월인데 추웠다고 합니다. 제가 10여 년전 건평에 있는 이건창 선생 묘소를 찾아왔을 때가 11월 경인데 바람이 몹시 불더라구요.

이건승 선생은 홑바지 차림에 동네 마실가는 차림으로 나섰답니다. 그때 따라나선 이가 장조카 이범하, 영재 이건창의 큰 아들입니다. 횡도촌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작은아버지가 만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이불을 갖고 따라갑니다. 그때는 이불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물건이었거든요.

60년대인가 조선족인 일가 중 한 분이 어찌 어찌 한국에 왔는데 수레에 이불만 잔뜩 쌓아서 왔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에야 이불은 다 버리지만 그때는 이불이 제일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횡도촌에 망명한 선비들이 모여요.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신채호선생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개를 가진 의성 김씨 집안으로 임진왜란 당시 김성일 선생의 12대 손입니다. 또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 이런 분들이 횡도촌으로 모이죠.

석주 이상룡과 백하 김대락은 처남매부지간인데 의병운동을 토대로 안동에서 신학문, 신교육을 도입했던 분인데 이분들이 약 150여명이 일시에 망명합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 집안 70여명 정도도 압록강을 통해서 횡도촌으로 모이죠. 경재 이건승등 강화학파들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래서 횡도촌은 일시 조선 망명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곳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임청각을 다 팔고, 우당 이회영 선생 등이 재산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여 모입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장소는 합니허라는 곳인데, 우당 이회영 선생이 중국의 원세개, 황제까지 되었던 사람인데 그가 주선해서 서간도에 약 100만평 정도 되는 땅을 빌립니다. 삼원보라는 곳인데요. 거기에 경학사라는 민정조직을 건설합니다.

아까 양명학의 기업 얘기를 했는데, 양명학이 성리학과 좀 다르게 현실적인 학문이라는 것이 단순한 철학보다 경제학, 경영학 우리로 따지면 실질, 물질과 관련된 것에도 개방적인 학문입니다. 대개 고루하다고 생각되는 성리학에 비해 양명학은 현실적인 방안을 제기하는 도구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강화학파가 양명학에 기초하고 있듯이 그때 모였던 석주 이상룡같은 고성 이씨 이분들도 사실 양명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당 이회영 선생이나 진천의 보재 이상설 선생, 위당 정인보 이런 분들이 모두 양명학에 근거를 둔 분들이지요. 이분들이 상당한 토론을 통해서 만든 첫 작품이 바로 경학사입니다.

경학사는 민정단체인데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조직하기 보다 오히려 경제적 부조단체, 사회적 경제에서 말하는 협동조합, 이런 조합들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으로 서로 도와주는 경제적 부조를 앞세우는 단체였습니다.

협동조합 도시로 유명한 스페인의 몬드라곤에 가보니까 , 경학사가 이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11년 만들어진 경학사는 바로 양명학에 기초를 둔 새로운 양명학적 민정단체인데 사실 자료가 별로 없어서인지 연구가 잘 안되어 있어요.

경학사가 강화학파가 새로운 철학과 경세적 사고를 현실에 적용시킨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강화학파를 중심으로 한 양명학자들이 경학사를 중심으로 조직과 테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경학사의 학습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가 됩니다. 지금 이곳은 대부분 댐이 들어서고 많이 수몰되어 버렸습니다. 1911년 신흥강습소가 생기고 나서 약 10년 활동을 하다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새로운 조직으로 전환된 계기가 1920년 청산리,봉오동 전투입니다.

내년이 청산리, 봉오동 전투 무장승리 100년이 되는 해인데, 그것을 기념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산리, 봉오동전투 지역도 수몰되어 아쉽습니다. 이번에 만주를 둘러보았는데 연변대가 옛날 사진을 웹으로 만들고, 또 체코에서 아카이빙을 하고 있는데 슬라브어로 된 자료가 많습니다. 거기 보니 체코가 건국되기 전에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던 보헤미안 부대가 무장이 뛰어났답니다. 이 부대가 스탈린에 막혀 트로츠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노력으로 이들 무기의 일부가 청산리 전투에 투입됩니다. 정예 일본군 2개 연대가 중대급 부대에, 그것도 목총으로 훈련한 병사들한테 당할 수 있었냐고 의문을 품지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기개가 대단했고, 거기에 체코의 신식무기가 제공되어 가능했다는 것이죠.

저희 이주숙 고모는 1910년생이신데,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따라 만주로 가서 201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00세 되던 해 수원의 조그만 저수지에 붙어있는 초코파이 파는 가게를 운영하던 아들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고모만 생각하면 가슴이 싸합니다.

고모님 말씀이 자기는 무기를 몸 양쪽으로 지니고 열 번도 넘게, 수없이 왔다갔다하면서 무기를 날랐다고 해요. 그때 무기를 부녀자들이 가락지를 팔아서 무기 사는데 보태고, 또 돈을 모아서 부산까지 가서 무기를 구입했답니다. 기관총은 분해해서 쌀 뒤주에 숨겨서 이동했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무기를 신흥무관학교 학생 모두에게 제공했는데 2개 중대 병력에 16개의 기관총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일본군은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고, 또 전술적으로 협곡으로 몰리면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겁니다. 나는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전술이 먹힌 것인데 내년 무장 승리 100년을 맞이해서 확실한 고증이 더 필요하리라 봅니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자 일본군이 추격에 나서면서 병력이 분산되고 많이 희생을 당합니다. 만주 일대가 초토화되는데 그때 죽은 조선인이 수십만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승, 정원하, 홍승헌 선생은 모두 병들어 돌아가시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 대부분 횡도촌에서 돌아가셨는데, 함께 망명하셨던 다른 분들은 절반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하다가, 나머지는 병으로 돌아가십니다.

저희 이은숙 할머니가 쓰신 <서간도시종기>를 보면 자세히 나와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할머니한테 화선지를 주시면서 생각나는 대로 쓰시라고 해서 만들어진 책입니다. 내용을 보면 가군(家君. 우당 이회영)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거나 하는 구절처럼 한자와 언문이 섞인 것이라 너무 어려워서 한 장 보는데 한 시간씩 걸렸습니다.

서간도 시종기는 신흥무관학교 등의 활동을 부인이 보는 입장에서 쓰셨습니다.

내용을 보면 돌아가신 분들은 행방불명이거나 병들어 죽습니다. 경재 이건승 선생도 1924년에 병으로 돌아가시는데 할머니 책에 나온 분위기를 보면 이렇습니다. 독립운동 하겠다고 모시적삼에 한복입고 오셨던, 경세와 지략이 뛰어나신 분이지만 그냥 농사꾼이 되어 매해 농사만 짓고 삽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조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독립운동을 하려고 해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거죠. 게다가 중국이 통제가 잘 안되니까 마적 떼들이 창궐해서 막 약탈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을 보호할 민정조직도 만들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또 나이든 망명객들은 변화된 풍토와 싸우시다가 조금만 상처가 나도 파상풍, 즉 염증으로 돌아가십니다. 기록에 보면 한 분이 병이 나면 들쳐 업고 200리를 가야 의원을 볼 수 있어요. 이처럼 병마와 싸운 모습들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둘째 형님이 이석영인데 북경에 살고 있었어요. 이회영 선생이 아나키스트로 1932년 관동군 무토사령관을 잡겠다고 만주 대련으로 왔을 때, 북경에 있는 둘째형님을 뵙고갑니다. 둘째 형 이석영은 재산이 많았습니다. 명동에 당신 땅도 있었지만, 본인이 양자로 가서 받은 땅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양주 지역, 지금으로 치면 남양주,구리, 서울 일부를 포함하는데, 지금 남양주 땅이 거의 이석영 땅이었다고 합니다. 300만평 정도 되었다고 해요.

그런 거부였는데 북경에서 굶어서 죽습니다. 그 분의 아들이 둘 있는데 우리 가족사에서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첫째 아들은 이규준이란 분으로 가족 대소사를 챙기던 좋은 아저씨였답니다. 일가가 아프면 데리고 가서 치료하고, 동생 봐주고, 마음착한 아저씨인데, 그분은 다물단 단장이었습니다. 다물단은 밀정을 가려내고 처단하던 단체입니다.

그때 밀정이 너무 많았거든요. 밀정이 하나 있으면 그 지역이 초토화되기 때문에 밀정을 가려내고 처단하는 일이 중요했는데 그 일을 다물단이 한겁니다. 다물단 단장이 이석영의 첫째 아들 이규준 선생이었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어요.

저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 키워드는 밀정과 암살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육군사관학교가 정문에 다섯 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도 들어가 있죠. 그때 교장께서 우리는 총알도 있고 막사도 있고 총도 있는데, 이분들은 그것도 없이 기개로 싸웠다.”고 말했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전선이 있는데 그때는 전선이 없었습니다. 총알이 어디서 어디로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밀정에 의해 옆이나 뒤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으로 그분들은 전선없는 전쟁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3211월 둘째 형님에게 하직인사하고, 지하 공작망을 조직하고, 무토 일본군사령관 암살을 준비하기 위해 대련으로 갔으나 항구에서 체포되어 1117일 여순감옥에서 옥사합니다.

그런데 대련항에서 체포되었던 것은 이석영의 둘째아들인 이규서의 밀고에 의해서입니다. 나중에 다물단에 의해 척결될 때 스스로 실토했습니다.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천장절 행사 때 윤봉길 의사가 물통,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군 시라가와 총사령관을 척살합니다. 그런데 그때 척살조로 들어간 것이 김구 선생의 애국단, 윤봉길 의사이고, 또 한 팀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입니다. 남화연맹에서는 명사수로 알려진 백정기 선생을 파견합니다. 백정기 선생은 윤봉길의사의 성공 이후 빈손으로 돌아섰다가 이듬해인 1933년 상해에서 일본 주중대사 암살을 모의했습니다만 역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국합니다.

옆 사진은 미해군 군함 미주리호에서 이루어진 항복문서 조인식입니다. 영화<암살>의 첫 장면에 나옵니다. 미국이 촬영한 영상에 보면 일본측에서 한사람이 절뚝거리며 나와서 서명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자가 바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다리를 잃은 당시 일본 주중공사 시게마쓰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장면을 볼때마다 마치 윤봉길의사가 이자의 목덜미를 쥐고 걸어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우리 교과서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일화이지요.

당시 상황을 돌아보면 밀정이 너무 많으니까 척살조로 파견될 분은 입이 천금처럼 무거운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그랬고, 백정기 선생이 그랬습니다. 백범과 우당은 비밀리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당 이회영 선생이 북경에서 둘째형님을 만나고 11월 만주 대련으로 이동하자, 그 때 항구에서 남루한 모습으로 변장한 이회영 선생이 바로 체포됩니다. 호위하러 나왔던 비밀결사대원이 보는 가운데 체포되어 바로 여순감옥으로 연행됩니다. 밀정이 밀고한 것이죠.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뒷조사를 해보니 밀고자가 이규서라는 것이 밝혀졌고, 바로 처단되었습니다. 조선 최대의 거부였으나 북경에서 굶어죽은 이석영 선생, 첫째 다물단 단장 이규준 둘째 밀정 이규서. 우리 가족사 중에 가장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고모님한테 제가 그랬어요. 고모님이 상세히 알고 있으니까 글을 쓰시라고 했는데, 그때마다 알았어. 알았어 하시면서 끝내 쓰시지 않았습니다. 직접 독립투쟁을 했던 분이기에 서간도시종기 이상가는 어마어마한 자료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자기 기억을 지우는 기억술이 있었다고 해요.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자들을 보내서 주변관계를 말씀드리면 기억을 하실까 싶었지만 끝내는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말씀을 안하셨어요.

아나키스트들은 잡혀서 고문당하면 불 수밖에 없으니 그냥 기억을 지우는거죠. 그때 고문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정보를 안불기 위해서는 바로 죽는게 제일 좋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당 선생이 체포된지 몇일 만에 돌아가셨다는게 이해가 됩니다. 할머니도 처음에는 글을 쓸까 말까 무척 고민하셨거든요.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간직한 삶의 원칙과 태도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합니다.

아마 고모가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가신 것은 아나키스트들이 겪어야 했던 암살과 밀정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을 그냥 자기가 안고 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하신 거 같습니다.

이번에 신흥무관학교라는 뮤지컬을 올렸는데, 시나리오 작가와 상의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의 투쟁원칙을 이런 가사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동지들의 꿈속에 남는다. 나의 가난한 유서에 내 이름 석 자는 없다. 그저 피로 쓴 여섯 글자 대한독립만세.”

신흥무관학교가 의열단이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신흥무관학교 핵심들은 대부분 의열단을 중심으로 아나키스트로 변하고 투쟁 과정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광복군 2지대로 갑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가사입니다.

일본은 세계전략을 구상하면서 경찰 정보망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경찰 정보망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신흥무관학교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얼마전에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서 일본에서 토론회를 했는데 관계자가 말하기를 이 자리에 최소한 일본 정보과 형사가 5명은 와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핵심은 정보이고, 이런 정보의 후예들이 지금 경찰을 이끌고 있습니다. 친일경찰 노덕술도 정보, 고등계형사입니다. 이들이 수많은 밀정을 심어놓습니다. 회유하고 포섭하면서 독립운동 진영을 초토화시키는 것이죠.

3500여명이 넘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일본과 싸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밀정, 밀정을 심은 일본과의 정보전을 펼칩니다. 아마 지금도 다르지 않겠지요.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는 그냥 선언서입니다. 유일하게 무오독립선언만이 대한독립선언서라고 딱 명명합니다. 조선독립선언으로 할 것인지, 대한독립선언으로 할 것인지 토론 끝에 대한독립선언으로 한 것인데, 무오독립선언은 독립운동의 모든 방략을 그대로 싣고 있습니다. 무장혈투가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참여한 사람은 39명인데 이승만, 안창호도 있지만 실제로 무장투쟁을 하신 분들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1/3 정도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이동녕, 김동삼,이시영,이회영 등 10여년 동안 무장혈투에 잔뼈가 굵은 최고의 항일운동가들이 토론을 하고 그걸 조소앙 선생이 집약하여 선언서를 작성했습니다. 조소앙 선생의 문장은 이광수, 최남선에 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의 두 선언서에 비해 훨씬 더 선명하고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명문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앞의 두 선언서에 비해 무오독립선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걸 보면서 역사 서술의 주체와 운동 주체의 불일치가 있다고 보여지고, 우리나라가 아직 가야할 길이 멀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무오독립선언의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으로 이어집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규정합니다. 그때 신채호 선생은 고려공화국이라 하자,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나온 말인데 망한 나라의 이름을 왜 쓰냐고 가장 통일에 가까웠던 것이 고려이니 고려공화국으로 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한민국으로 결정합니다. 이걸 보면 우리 선조들의 조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조들은 항상 중간을 택합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총리로 정합니다. 이승만의 본질을 누가 몰랐겠습니까? 당시 큰 어른이고, 지도자였던 석주 이상룡이 아닌 이승만을 택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지도자의 생각들은 아주 면밀하고 현실성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일은 안했고 이런 조심성이 피부에 와닿습니다. 대한민국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일어난 일본의 경제전쟁을 보면서, 신자유주의시대에 이런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도 참아낼 수 있나.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데 냉정하게 상황을 보면서 선조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항상 생각합니다. 만주 벌판에서 고생하고 죽음을 당하면서, 그분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저쪽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짐작하면서 정세를 분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선조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통일된 국가를 염원한 선각자들 육군사관학교 정문 동상들 지금은 영토도 있고, 적들이 쳐들어오면 피할 장소도 있으나 그때는 일본군들이 총들고 들어오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으려면, 독립의 끈을 이어가려면 국제정세를 살피고, 동향을 관찰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약소국회의 동영상이 최근 공개되었는데, 거기에 우당 이회영 선생, 조소앙, 홍범도 장군의 모습이 나옵니다. 국제 정세에 민감하고, 국제적인 연대와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활용하는 모습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에서 한인 사회주의자의 행동에 대해 실망을 느꼈던 것 같아요. 저의 큰아버지 이규창 선생은 1933년에 잡혀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요. 광주교도소에서 박헌영과 같이 있으면서 삐라 만들어 뿌리고 징벌방에 갇히기도 했다는데 그들은 아나키스트인 우리하고는 달랐어라고 말하더군요. 그 안에 있었던 일을 <운명의 여진>이라는 책으로 썼는데, 쉬운 한글말로 바꿔서 출판하려고 합니다. 그분이 45년 해방되고 나서 감옥에 나오니 노덕술이 집을 지키더라는 겁니다. 몇십년 감옥살이하고 나왔는데, 옛날에 나를 잡으러 다니던 놈들이 또 나를 잡으러 오는구나면서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김구선생도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거의 도망다니며 살았습니다. 장강의 뱃사공 품에서 3년을 숨어 지내기도 했을 정도였는데, 그런 분이 해방된 조국에 와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백범의 암살은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이다, 백범의 죽음으로 우리 사회는 완전히 친일사회로 복원된 것입니다. 근데 그 나라가 결국 어려움을 이겨내고 친일을 응징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흔치않은 나라이죠. 정말 우리 사회는 간단치 않은 사회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스케가 패망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그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이 1944년 전세가 악화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일년동안 국채 발행을 엄청나게 합니다. 1945년에는 거의 일년 예산 수준으로 국채를 발행해서 그걸 나눠줍니다. 내가 돌아올 때 힘이 되고 약이 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내가 돌아올 때 생기는 힘이 바로 국채발행, 즉 돈이잖아요. 그리고 맥아더 포고령에 의해 아베의 이 말이 지켜졌고, 감옥에서 나왔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가고, 일본을 해하는 사람은 우리가 사살한다는 맥아더 포고령으로 그때 사람들이 어? 다시 일본시대가 오는구나하고 어리둥절했던 것이죠. 그리고 몇 년 후 미군정에 의해 우리는 완전한 일본체제로 복귀하고 맙니다. 일본 대학 나온 사람이 출세하는 그런 친일사회가 되어버린 겁니다. 백범과 그시대 선각자의 발언이나 선언문을 보면 독립보다는 하나의 국가가 더 급했습니다. 분단된 국가는 우리의 죽음이다. 분단되면 저들의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독립의 선결조건은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죠. 그때 국제정세라든지 모든 면에서 분단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을 해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독일은 동서로, 발칸반도와 중국, 베트남 모두 분단 되었습니다. 유행같은 분단의 늪에서 우리는 독립을 위해서는 하나의 국가가 필요했다고 외친 것이죠. 우리는 실제로 분단으로 전쟁을 겪었고, 친일과 냉전 속에서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지금의 일본을 이겨내는 선결과제는 무엇보다 평화적인 통일입니다. 하나의 국가로 가야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대한독립을 외쳤던 선각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최대의 과제입니다.

-강화뉴스, 2019.9.5. 정리 : 박흥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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