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항쟁사 신문에서 퍼온 역사

      

물리친 국민성ㆍ젊은 패기 알아야 '포스트 차이나' 품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왕조나 국가들은 많다. 이들의 끝은 대개 허망하다. 타민족 침입으로 국력이 쇠락해지고, 이민족 지배를 장기간 받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론은 베트남에 적용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최강국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으면서도 결국엔 승리를 쟁취하는, 흥미로운 역사가 반복된다.

기원전 111년 베트남 왕조 남비엣은 한나라 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베트남은 이때부터 중국의 천년(B.C 179~A.D 938) 가까이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정도 기간이면 나라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명맥이 끊길 법도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983년 독립을 쟁취한다.

독립 후에도 베트남은 세계 최대 규모의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침략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나온 쩐흥다오 장군의 박당강 전투는 베트남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승전 중 하나다.

당시 통치자인 년똥(仁宗: 1273~1293)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몽골에 항복하자는 의견이었지만, 쩐흥다오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박당강의 수위를 이용해 미리 강바닥에 나무 기둥을 심고 원나라 군대를 유인한 후 원나라 배가 나무기둥으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불을 질러 대승을 거둔다. 결국 베트남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몽골 침략을 모두 막아낸 국가가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베트남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프랑스 덕에 만들어졌다는 점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주교인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 1591~1660)가 정리해 1651년 출판한 <베트남어-포르투갈어-라틴어 사전>은 현재 베트남 문자의 효시가 되었다.

오랜 기간 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후 베트남이 독립을 했음에도 여전히 지배권을 요구한다. 프랑스는 1946년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선출한 호찌민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호찌민 군이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권 진영에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를 지원하였다. 반면 호찌민 군은 소련 등의 공산진영의 지원을 받는다. 베트남은 이 전쟁에서도 프랑스를 물리친다. 1954년 호찌민 군이 프랑스 군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함락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 베트남은 다시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196484일 북베트남 수도인 하노이 앞바다를 순찰하던 미국 구축함들이 공해상에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는, 일명 통킹만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라 발단이 됐다. 당시 북베트남은 이런 사실을 부인했지만, 미국은 이를 빌미로 북베트남을 폭격했다. 이것이 베트남전쟁으로 알려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베트남은 이 전쟁에서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물리치고 승리해 1976년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을 이룬다.

하지만 베트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강대국과의 분쟁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의 중화인민군이 베트남을 전격 공격하면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중국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친중국계 캄보디아 정권과 무력 충돌했다는 이유였다. 베트남은 이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뒀고 현재 국경선이 이때 확정됐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은 원나라를 비롯해, 프랑스, 미국, 중국 등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이 같은 베트남의 저력은 오랜 기간 걸쳐 형성되는 국민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베트남인의 장점으로 꼽는 교육열이나 근면성 등은 과거 역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일보, 2020. 09. 05.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덧글

댓글 입력 영역